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버트 E. 리 (문단 편집) === 군복을 입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1px-Robert_E_Lee_1838.jpg|width=300]]}}}|| || 32살의 공병 중위시절 초상화 || [[버지니아 주]] 렉싱턴 출생. 아버지는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육군 [[기병]]대장이었고, 1829년 [[미국육군사관학교|웨스트포인트]]를 차석으로 졸업하며[* 동기이자 수석 졸업자인 찰스 메이슨에 이어 46명의 졸업생 중 2000점 만점에 1966.5점으로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두 번째로 높은 점수로 졸업했다. 즉 200여년 역사에서 역대 2위인데 하필 역대 1위가 동기동창... 포병, 전술, 행동 부문에서는 메이슨과 리가 공동 선두를 지켰지만 다른 모든 과목에서 메이슨이 리를 꺾고 46명의 졸업생 중 2000점 만점에 1995.5점으로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가장 높은 점수로 졸업했다. 여담으로, 메이슨과 리에 이은 웨스트포인트 역사상 세 번째로 높은 점수의 졸업생은 93명의 졸업생 중 2470점 만점에 2424.12점을 기록한 [[더글러스 맥아더]]이다. 한편 찰스 메이슨 역시 공병장교를 선택했지만, 졸업 후 웨스트포인트에서 공학교수로 2년간 복무하다 군인체질이 아니었는지 전역해버렸다. 이후 법률공부를 하더니 30대에 아이오와 주 초대 대법관이 되었고, 40대엔 철도회사를 세워 사장이 되었고, 다음엔 미국 특허청장이 되는등 다방면에서 활약하다가, 결국 아이오와주 주지사에 도전하지만 --역시 정치는 머리로 하는게 아니어서-- 당선에 실패했다.] 당시 웨스트포인트 우수 졸업생들의 전통을 따라 육군 [[공병]][[소위]]로 임관하여 일선 근무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미국은 그 당시까지 독재를 막기 위해 상비군의 규모가 작았고, 주로 외곽 쪽에서 경비와 진지 구축, 영토 개척 위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육군의 경우 공병에 가장 우수한 장교들을 배치하였다. [[미 육군]][[원수(계급)|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도 공병 출신이다. 남북전쟁 발발 당시 연방 육군의 상비군은 3~4만 정도. 때문에 [[인사적체]]도 심하여 아무리 유능해도 진급을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external/www.texasbeyondhistory.net/lee-lg.jpg|width=300]]}}}|| || 1850년대. 텍사스에서 근무하던 중령 시절 || 그 뒤 1846년부터 [[미국-멕시코 전쟁]]에 종군하며 [[참모]]로서도 많은 공을 세웠고, 이후 웨스트포인트 교장직을 맡기도 했다. [[미군]](정확히는 연방 육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대령이나, 보직은 중령 시기에 맡았던 제2기병연대 부연대장직이 마지막. 이는 남북전쟁 직전의 혼란과, 아내가 갑자기 많은 부동산을 유산으로 물려받게 되면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1858년부터 1860년까지 안식년을 얻어서 고향에서 농장을 경영했기 때문이다.[* 아내도 비범했는데 마샤 워싱턴과 그의 첫 번째 남편의 증손녀였다. 즉 [[조지 워싱턴]]의 양증손녀.] 1859년에는 그 유명한 '[[존 브라운|존 브라운의 난]]'을 진압한 적도 있다. 과격 반노예주의자였던 존 브라운이 노예들을 해방시킬 목적으로[* 이전에 브라운은 이미 노예옹호자인 백인 5명을 살해한 '포토와토미 학살사건'을 저지른 적이 있다.] [[미합중국 육군|연방 육군]]의 무기 창고를 습격해 점령한 사건으로, 이때 로버트 리는 [[미합중국 해병대|연방 해병대]]와 [[민병대]]를 이끌고 브라운 일행을 공격, 소탕하고 존 브라운을 체포한 것이다. 브라운은 반란 행위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헌데 남북전쟁 이후 브라운의 행적이 재평가되면서 덩달아 리에 대한 평가가 미묘해지기도 했다. 리 입장에서야 어디까지나 불법으로 군 창고를 점령한 자들을 진압했을 뿐이고, 노예 해방 문제에 대해선 별로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 흑인 노예 문제가 워낙 거대한 사안인데다 리 자신이 남북전쟁 당시 상당히 큰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라서 구설수에 오르기가 쉽다.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대령]]으로 진급한 리는 연방정부의 명령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워싱턴으로 복귀, 무보직 상태로 대기했다. 본래 리는 고향 버지니아의 연방 탈퇴를 완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연방정부의 편이라는 인식이 많았다. 이 덕분에 총사령관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 소장의 추천으로 미합중국 육군(북군)의 사령관 후보자로 올라있는 상태였다. 스콧은 리와 같은 버지니아 출신이었고,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리의 활약을 직접 목격하여 리를 연방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교로 볼 정도로 높이 평가했다. 이 시점에서 리는 남부의 독립에 대해 확고한 반대 의사를 밝히고 있었으나, 1861년 4월 섬터 요새에서 연방군과 남군의 최초 무력충돌이 벌어지고 이에 대한 대응으로 연방정부가 반란진압을 위한 의용군을 편성하자 연방정부에 등을 돌렸다. 이 시점에서 스콧의 추천으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그를 지목하여 임시[[소장(계급)|소장]]계급과 함께 반란진압 총사령관 직책을 제안했으나, 리는 고향에 총을 들이댈 수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고향인 버지니아로 돌아갔다. 스콧은 리가 거부 의사를 자신에게 직접 밝히자 크게 상심하였고, 리가 '일생 최대의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을 남겼다. 리는 버지니아가 중립으로 남거나 연방에 가담하면 연방군에 복귀할 의사가 있었던 것 같으나, 정작 버지니아는 그가 사령관직을 거부한 바로 그날 주지사가 연방에서 탈퇴를 선언하고 남부연합에 가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